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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보내달라 외침 외면 못 해…”

한현숙(83·사진)씨는 미네소타주에서 입양아의 대모(代母)로 불린다. 그는 50여 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당시 한국 입양 기관인 국제사회봉사회에서 처음으로 근무를 시작(1964년)할 때다. 한씨는 “그때 한국에는 고아가 너무 많았다. 대구 한 고아원에 갔는데 200여 명의 아이들이 방 안에 가득하더라. 제대로 눕지도 못할 만큼의 공간이었다”며 “그때를 잊을 수 없다. 나를 보더니 다들 소리를 지르는거다.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를 ‘양자로 보내달라’며 이름을 외치는 소리였다”고 말했다. 너무나 가여웠다. 입양 사역에 평생 몸담겠다고 결심한 게 그때다. 한씨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 좋은 부모를 만나길 원했다. 당시 열악했던 한국의 경제 사정으로는 그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입양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다. 한계가 있었다. 한씨가 해외 입양으로 눈을 돌렸던 이유다. 그는 미네소타 아동복지회와 연이 닿아 1975년 미네소타로 왔다. 한씨는 “미국 입양 역사에는 '고아 열차(orphan train·1854~1929)’가 있다. 당시 넘쳐나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어 아이들을 열차에 태워 동부 각 도시의 역(驛)을 거치며 서부 쪽으로 입양을 보냈던 이야기”라며 “그때 아이들을 가장 많이 입양했던 게 미네소타 사람들이다. 이곳은 미국에서도 입양에 가장 열려있던 주”라고 말했다. 그는 은퇴(2003년) 전까지 오직 입양아를 위해 살았다. 아들을 직접 입양하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으로 데리고 온 한인 입양아만 1만 명이 넘는다. 한씨는 “많을 때는 1년에 600명까지도 한국에서 데리고 왔다”며 “입양은 이후에도 양부모와 상담도 하고 아이들이 잘 크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 한국에서의 입양도 과거에 비해 많이 변했다. 그는 “한국에 가보니 출산율도 낮아져서 예전만큼 고아도 없다. 한국의 시설도 정말 좋아졌다”며 “미네소타로 입양 오는 아이들이 많이 줄은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미네소타 한인 사회는 타주와 달리 입양인의 영역이 존재한다. 한국과의 인연 사이에 사람이 있어서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7-13

미네소타 한인들, 미국인 편집장이 '뉴스'로 연결

미네소타주 한인 사회는 ‘언론’을 보유하고 있다. 영문 계간지 ‘코리안 쿼터리(Korean Quarterly)’는 한인 관련 뉴스 전문 매체다. 특이한 건 미국인이 편집장을 맡고 있다. 이 신문은 벌써 23년째(1997년 발행) 운영되고 있다. 부부인 마샤 빅커리(사진) 편집장, 스티븐 운로 발행인이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은 시라큐스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코리안 쿼터리는 미네소타주와 한국의 인연 사이에서 태동했다. 미네소타주는 한인 구성이 다양하다. 1세 이민자와 2세 외에 한인 입양인이 많다. 입양을 한 미국인 가정까지 한국과 연결돼 있다. 빅커리 편집장과 운로 발행인 역시 세 자녀 중 두 명(순영·한용)을 한국에서 입양했다. 빅커리 편집장은 “미네소타주 한인 사회 안에는 언어, 배경, 문화 등이 각기 다른 3~4개 이상의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며 "이런 한인 사회가 어떤 뉴스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코리안 쿼터리가 시작됐다. 한인을 위한 언론으로서 다양한 구성원을 연결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시작은 뉴스 레터였다. 이들 부부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주기 위해 자녀를 지역 한인 교회에 보냈다. 거기서 교회의 도움을 받아 입양인과 한인 사회를 연결하는 목적의 뉴스 레터 1200부를 제작, 배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금은 비영리 독립 계간지로서 이 지역에서만 1만 부가 배포된다. 정규·비정규 기고자만 30여 명 이상이다. ‘미니에폴리스·세인트폴 매거진’에서 수석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는 한인 킴 잭슨 씨도 이 신문의 편집 등을 돕고 있다. <본지 6월25일자 A-4면> 빅커리 편집장은 “코리안 쿼터리는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코리안-아메리칸’의 경험과 시각을 지면에 담고자 한다”며 “한인 사회 요구에 대답하고 뉴스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코리안-아메리칸’의 삶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신문의 독자층은 한인을 넘어 계속 확대되고 있다. 미네소타 주류 사회에서는 “한국을 알려면 ‘코리안 쿼터리’를 봐야 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실제 코리안 쿼터리의 취재 영역은 상당히 넓다. 위안부 논란 특집 기획 도쿄 전범 재판 현장 취재, 통일 기획 시리즈 북한 방문 취재,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영어 의무화 논란, 하와이 한인 이민자 4세대 취재 등 굵직한 이슈까지 다루고 있다. 때문에 미네소타신문협회(MNA), 뉴아메리칸미디어(NAM), 유튼 리더(Utne Reader) 등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며 공신력 있는 언론으로 자리매김했다. 요즘 코리안 쿼터리는 디지털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웹사이트(www.koreanquarterly.org)도 새롭게 개편했다. 미네소타주 외에도 타지역, 해외에서까지 구독자가 확장되고 있어서다. 신문 콘텐츠는 일회성 소비가 아니다. 역사적 자료다. 빅커리 편집장은 “디지털 전환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이슈에 대한 ‘디지털 기록 보관화’에 있다”며 “현재 이 작업을 위한 기금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부부는 풍물패 ‘신바람’도 운영하고 있다. 입양인, 양부모, 한인 2세 등 다양한 회원들이 활동중이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7-09

“한국산 식물 많은 곳 ‘한국 언덕’ 만들어야”

김권식 대표(77·사진)는 미네소타주에서 ‘태양을 꿈꾸는 사람’으로 불린다. 그는 이곳에서 태양광 재생에너지 회사 EVS를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미네소타주와 한국과의 인연을 늘 가슴에 품고 산다. 그는 지난 2017년 미네소타대학 농과대학 부속 수목원에 본인과 아내(황성숙)의 이름으로 작은 벤치 하나를 마련했다. 김 대표는 “죽으면 다 끝나는 건데 묘지는 필요 없지 않느냐. 우리 부부와 가족이 가장 즐겨 찾는 곳에 벤치 하나 만들자는 제안에 기부를 해서 마련하게 된 것”이라며 “훗날 우리 손자들, 친지가 의미가 있는 이 벤치에 와서 함께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 수목원에는 한국의 흔적이 많다. 한국전 후 미네소타대 교수들이 한국에 나가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한국산 식물이 곳곳에 심겨져 있다. 때문에 수목원내 ‘한국의 언덕’도 추진중이다. 그는 “수목원내에는 중국, 일본 가든도 있는데 한국 관련된 정원이 없어 항상 아쉬운 마음”이라며 “75만 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한인사회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동참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1969년 미네소타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어느덧 51년째다. 요즘은 그동안 맺은 노력의 열매를 아낌없이 나누며 산다. 그는 군 복무 당시 백령도에서 2년간 야학 선생으로 활동했다. 지난해에는 당시 제자 11명을 미국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EVS에서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연수 기회도 제공한다. EVS는 미네소타주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2017)’에 선정됐다. 김 대표는 최근 재미과학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기업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둘째 아들을 입양했다. 미네소타주에서는 매년 입양 가족을 위한 ‘캠프 조선’이 진행된다. 매년 한국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캠프 조선에 봉사단을 보내는데 김 대표 부부는 이들을 물밑에서 돕는 역할도 맡고 있다. 그는 노래를 사랑한다. 최근에는 음악을 즐기는 미네소타 한인들이 만든 ‘뜸부기 합창단’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미네소타와 맺은 인연을 희망으로 전한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7-06

“그들이 떠난 학교에 우리 딸이…”

미네소타주의 김병문 박사(76·사진)는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해 산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가를 알면 알수록 감사해진다”고 했다. 김 박사는 197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미네소타대학에서 교육행정학 석·박사를 취득(1984년)했다. 그는 2004년부터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들을 위해 매년 감사 야유회를 진행하고 있다. 참전용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음악 공연도 함께 즐기면서 감사를 표하는 시간이다. 매해 행사를 DVD로 제작, 타주 지역 참전용사에게까지 나눠주고 있다. 2014년부터는 매해(1인당 500달러·총 20명) 자비를 들여 참전용사 후손들을 위한 장학금 사업도 펼치고 있다. 김 박사는 “전쟁의 승패는 결과를 봐야 한다. 남과 북의 발전상을 비교해보면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가를 알 수 있다”며 “한국을 잊어버리고 싶다 했던 그들이 훗날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보며 너무나 놀라워 한다. 그들은 한국 제품까지 사용하며 미국 사회에서 한국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본지의 공개한 사진<본지 6월25일자 A-1면>을 보면 아직도 눈시울을 붉힌다. 1950년 12월20일 미군들이 고아 1000명을 미 공군 수송기(C54) 16대에 나눠 태우고 서울에서 제주도로 피신시킨 사진이다. 김 박사는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미군들이 고아들을 안고 내리는 사진은 지금봐도 감동적"이라며 “나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혜택은 못 받았지만 대신 참전용사들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다”고 말했다. 그는 둘째 딸이 1998년 MIT에 입학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MIT 10번 건물 벽면에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MIT 학생 8명의 이름을 봤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그들이 돌아오지 못한 학교에서 우리 딸이 공부를 하게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며 “한편으로는 너무나 애통했을 학생들의 부모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참전용사 장학금 사업이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지고 있다. 또,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한국 교육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책도 쓰고 있다. 김 박사는 “그들은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싸웠다. 나는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고마움을 생각하면 그들의 이름이 대대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은혜를 아는 이상 그가 감사를 멈출 수없는 이유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7-05

과격 시위 때도 제 역할 톡톡

미네소타한인회 황효숙 회장(46대·사진)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한 시위로 갑자기 ‘미네소타’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황효숙 회장은 “원래 이곳은 상당히 평화롭고 조용한 곳인데 조지 플로이드 사건 때문에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주목을 받았다”며 “과격 시위로 인해 한인 업소들이 피해를 입어 한인회가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미네소타주 한인사회는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적극 나섰다. 교회, 개인, 미네소타주를 거쳐간 한인 등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2만4088달러를 피해자들에게 전달했다. 황 회장은 “피해를 입은 한 업주는 전화를 해보니까 펑펑 울더라”며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한인끼리 아픔을 나눈다는 의미가 컸다”고 전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미네소타 한인회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인 양로원을 방문해 노인들을 위해 간식거리를 포장해 전달하기도 했다. 미네소타 한인회는 지난 2016년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한인회관 건립모금 운동을 시작한 지 무려 37년 만이었다. 역대 회장들이 모은 기금과 재외동포재단 회관 기금 지원을 통해 세인트폴 지역에 한인 회관을 세웠다, 모두가 힘을 합한 건립이었기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분쟁없이 운영될 수 있었다. 현재 한인회관은 한글학교, 입양인 단체 모임, 워크숍, 이벤트 장소 등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 회장은 개인 사업을 하는 가운데 지난 1월부터 한인회를 맡았다. 현재 한인회의 디지털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황 회장은 “한인회의 모든 서류 관리, 정리 등을 디지털화하고 웹사이트 개편 등 미래를 대비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며 "이번 한인 업소 돕기 성금 모금도 온라인을 통해 진행했는데 새로운 방식에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미네소타 한인회가 작지만 강한 이유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6-29

“지금의 좌우 논쟁, 한국전 때와 비슷”

미네소타주와 한국의 인연 사이에는 ‘사람(人)’이 있다. 송창원 박사(88·사진)는 방사선 생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1968년 한국인 최초로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논문을 게재한 인물이다. 발표한 논문만 300건 이상이다. 지난 18일 송 박사를 만났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미네소타대학 의대에서 연구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서울대 출신이다. 송 박사는 1세대 국비 유학생(1959년 9월)이다. 미네소타대학에서만 45년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도 한국전 참전 용사다. 늘 고국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송 박사는 “70년대 초 한국에서 방사선 치료 전문의가 없어 도움을 요청해온 적이 있다”며 "그 때 서울대에서도 3명이 왔는데 내가 비용을 다 지원했다. 고국에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송 박사는 계속해서 한국 의학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앞장섰다. 연수부터 강의까지 한국의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시간 할애부터 금전적 지원까지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아직도 매일 고국 관련 뉴스라면 빠짐없이 읽는다. 특히 “요즘 한국의 상황을 보면 답답하다”고 했다. 송 박사는 “한국전 당시와 지금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며 “그때도 ‘좌냐, 우냐’ 싸움이 심했는데 지금 한국이 극심한 좌우 논쟁으로 양분돼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양극화가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그는 한국전 참전 당시 부상을 입었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아직도 몸에 지니고 산다. 빼내지 못한 파편이 아직도 척추 옆에 그대로 박혀 있다. 송 박사는 “전쟁 당시 바로 옆에서 선임하사가 죽는걸 봤다. 하늘이 나를 살려준 건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직도 한국을 위해 일하는 이유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2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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